[애프터다크] 무라카미 하루키

책장정리 | 2022. 5. 19. 10:20
Posted by seesun



다카하시가 마리를 만나 새벽이 오기까지의 이야기.
오래전 나의 20대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무수히 많은 밤을 새웠던 20대의 시절로.

소설 속에서 잠시 만난 고오로기가 이야기한다.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 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서는 전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그냥 조용히 과거에 다녀온 느낌. 연료처럼 소진했던 작은 기억들을 떠올리며 소설 속 음악을 공유할 수 있어서 좋았다. 소니롤린스의 sonnymoon for two 같은 음악을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들을 수 있을까.
 

 

 

[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책장정리 | 2022. 5. 4. 17:40
Posted by seesun



정말 눈에 보이듯 잘 그려졌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이다. 
문장에도, 글의 여백에도, 대화를 하다가 잠시 머뭇하는 찰나의 순간에도 의미를 담아내었다. 어쩌면 이렇게 사람의 내면을 세밀하고 깊이있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건축학과 동창인 오카지마가 운영하는 직원 5명의 작은 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아오세 미노루. 거품경제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45세 이혼남인 그는 시키는 대로 도면을 그리고, 그저 편리한 도구로 쓰이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뼛속까지 현실주의자처럼 살아오던 그가 의뢰인에게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 주세요'라는 요청을 받고, 무엇에 홀린 듯 최선을 다해, 남향이나 동향이 아닌 북향의 빛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아름다운 집을 지어냈다. 그 집은 일본 전국의 개성 있는 주택을 엄선하는 [헤이세이 주택 200선]에 Y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실리고, 다른 의뢰인에게서 그와 똑같은 주택을 지어달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그 의뢰인은 Y주택에 가봤는데,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다며, 집안을 한번 볼 수 있게 집주인에게 부탁해줄 수 없냐는 조심스러운 요청을 한다. 아오세는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오카지마와 함께 Y주택을 찾아갔지만, 그의 불안한 예상처럼 집은 아직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느낌이었다. 

Y주택을 둘러보던 아오세는, 입주하지 않고 집을 방치해둔 이유가 무엇일까. 아니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걸까. 의뢰인 가족이 보였던 만족해하던 표정들을 기억하며 고민하기 시작한다. 집안에 있는 물건은 오직 창문 앞에 놓인 고상하고 소박한 나무 의자 하나 뿐. 

소설은 그 Y주택에 입주하지 않은 가족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이지만 내용은 '사람사는, 가족의, 정이 담긴 이야기'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와 상대를 배려하는 작은 몸짓부터, 주인공의 속마음까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느끼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한달에 한번씩 8년째 만나는 13살짜리 딸과의 많지 않은 대화 속에서 애틋함이 느껴진다. 전부인 유카리와의 덤덤한 통화나 묘사된 행동들에서도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이 묻어난다. 친구이자 회사 상사인 오카지마와의 이야기와 질투, 배려 같은 상황의 서술 또한 대단하다. 

어린 딸 히나코와 만나고 헤어지는 상황을 묘사한 글.
- 가게에서 나온 아오세는 온 길과 반대 방향인 아카사카미쓰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히나코가 사라진 길을 따라 걸으면 침울해지기 때문에 돌아갈 때는 늘 이 길을 택했다. 

이야기의 반전을 생각하게 하는 299p 
처음부터...? 이미 시작되어 있던 것이다?

"겉보기에 좋은 게 곧 아름다움이라 생각했는데..."

 

또다른 반전을 의미하는 유카리의 말 408p 
아 내가 실수했다고 생각했어. 당신이 짓고 싶은 집을 지으라고 할 걸...  '유카리' 8년 만에 이름을 불렀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알았다. 이렇게 정밀하고 내면 깊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었는지를...
이 소설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잡지에 연재했던 것을, 7년에 걸쳐 전면적으로 개고해 단행본으로 출간한 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원래 문장 중에 남아 있는 것 10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한번에 읽거나 두세번에 나눠읽던 소설과는 달리 여러번 나눠 읽었다. 한 문장도 허투루 읽히지 않고, 천천히 곱씹으며 읽어내려가게 만든 책이다. 주인공과 비슷한 또래이기에 더 그렇게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가 아닌, 가족을 이루고, 혹은 이루었었거나 이루게 될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도쿄기담집] 무라카미 하루키

책장정리 | 2022. 4. 27. 22:59
Posted by seesun


무라카미 하루키가 만들어낸 - 기묘하면서도 담담하고 슬프면서도 차분한 - 우연들로 이루어진 5가지 단편집.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신상에 일어났던, 대단하지는 않지만 '우연히' 일어난 몇 가지 신기한 일에 대해 말하는 첫번째 이야기. [우연 여행자]
화요일이면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는 피아노 조율사는 어느날 옆자리에서 같은 책을 읽는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는 그를 마음에 들어한다.
하지만 그는 여자보다는 남자와 더 평온한 관계를 갖는 취향의 남자다. 그녀와 그의 쿨한 대화, 그리고 그로 인해 다시 이어진 누나와 통화를 통해 전해지는 덤덤한 내용의 이야기.
소설 속에 나오는 프란시스 풀랑크의 곡을 틀어놓고, 읽으니 마치 옆에서 듣는 듯한 느낌도... [하나레이 해변]
주인공 사치의 아들은 하와이 하나레이 해변에서 서핑하다 상어에게 다리를 뜯기고 죽었다. 아들을 찾아간 그녀는 일주일동안 그곳에 머물며 자신을 되찾으려 애쓴다.
그뒤로 매년 아들의 기일에 맞춰 그 해변에서 삼 주쯤 머물며 바다를 바라보는 생활을 반복한다.
그렇게 10년 넘게 매년 같은 방, 같은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고 식사를 한다. 그러던 어느날 히치하이킹을 하는 젊은 아들 또래의 일본인 서퍼들을 자신의 차에 태워주는데, 그들과 나누는 쿨한 대화가 마음에 든다.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다시 만난 그 서퍼들은 외다리 일본인 서퍼를 해변에서 보았다는 말을 한다. 그뒤로 날마다 해변을 찾아가지만 볼 수도 없었고,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엄마의 마음. 겉으로는 쿨하고 무심한 듯 하지만 마음까지는 감출 수 없는... 먹먹한 느낌이 든다.

이 외에도 기묘하고 우연히 일어난 일들에 대한 3가지의 이야기가 더 있다. ‘계단에서 사라져버린 남편’ ‘몰래 움직이는 콩팥 모양의 돌’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 등 기괴할 수 있는 사건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며 읽게 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일하다가 짬짬이 하나씩 읽기 괜찮은 책. 디테일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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